정신과 의사가 본 '운인가 능력인가'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유 - 정신과 의사가 본 ‘운인가 능력인가

최근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이어오다가 취업준비생과 상담한 내용을 글로 올렸었습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SBS 스페셜에서 ‘운인가 능력인가’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습니다. 내용들이 너무 많이 와 닿더라고요. 그동안 아등바등 애쓰면서 살아왔던 저의 지난 시간들도 생각나기도 했고요. 참 아등바등 살아왔었습니다. 지금도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는 거 같고요.

이 타이밍에 생각나는 그 이름 ‘정유라’는 어떤 의미일까요? 정유라가 SNS에서 언급해서 유명해진 말, "너네 부모를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

그래요.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사회가 돌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 명제가 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동안 그것도 모르고,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고만 알고 살아왔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서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정신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의과대학을 다니던 시절, 저희끼리 자주 하던 농담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의대 교수면 성적과 관계없이 성골, 아버지가 성공한 개업 의사면 성적과 관계없이 진골, 빽은 없는데 성적이 좋으면 6두품, 빽도 없고 성적도 안 좋으면 천민이라고요. 그런데 의과대학생 시절에 자주 하던 이 농담이 현실을 너무 잘 반영한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노오력’으로 갈 수 있는 건 6두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사실 ‘노오력’으로 6두품까지 간 것만 해도 상대적으로 혜택을 본 것은 맞지요. 제 글을 읽고 ‘너 정도면 배부른 소리 하는 거지.’라고 말을 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기에는 저는 너무나 많은 ‘노오력’으로 인생을 때웠습니다. 스스로에게 연민이 느껴질 정도로 그렇게 살았습니다(저는 스스로 가진 능력에 대한 믿음조차도 없었었거든요). 그런데 만약 이 글의 논의의 초점이 ‘너는 그런 말 할 자격이 없어.’로 흘러간다면, 결국은 ‘을과 을’의 싸움으로 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성골과 진골은 아무런 노력 없이도 많은 것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리고 을과 을의 싸움을 재밌게 지켜보겠지요. 사람은 불만이 커지면 공격할 대상이 필요한데, 그것이 자신(갑)들이 아니라, 자기들끼리(을과 을) 그 공격성을 표출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는 것이지요.

‘운인가 능력인가’ 프로그램에서도 비슷한 내용들이 다루어졌던 것 같습니다. 서울교통공사라는 공기업에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이었습니다. 정규직 입장에서는 억울한 마음에 반발이 컸습니다. 나는 너무나 힘들게 시험공부해서 어렵게 입사를 했는데, 비정규직들은 무임승차를 하는 것 같은 마음에 그런 반발감이 생긴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 마음 충분히 이해되었습니다. 몇 년을 좁은 고시원에서 공부만 하고 어렵게 입사를 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 열매를 너무나 쉽게 얻는 걸 보고 마음 편할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노오력’의 무게가 적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애초에 그 ‘노오력’의 유무와는 관계가 없는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은 을과 을의 싸움으로밖에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우리가 눈을 돌려야 할 곳은 딴 데에 있지 않을까요? 너무나 커다란 파이를 소수의 사람들이 쉽게 가지고 있고, 작은 파이를 많은 사람들이 아등바등 다투고 있는 게 현재의 모습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작은 파이 속에 매몰되어 다툴 게 아니라, 커다란 파이를 어떻게 할지가 더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은 사회 모든 문제는 기득권 문제로 귀결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윗세대 분들은 한창 경제 성장기에 있었죠. 그래서 사실 많은 직업과 사회적 위치들이 무주공산이었습니다. 노력을 통해 조금 더 윗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도 있었고, 아랫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경제도 많은 발전을 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부정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부정을 하게 되면, 사회주의가 될 테지요. 사회주의가 실패한 제도라는 건 역사에서 보아왔기 때문에, 굳이 여기서 더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노력에 따라 차등을 주는 것은 사회 전체의 발전, 그 사회에 소속된 구성원의 이익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암묵적 동의 하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과거와 같이 무주공산이 아니더라고요. 이미 우리 윗세대가 많은 파이를 차지하고 비키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아랫세대는 남은 작은 파이를 가지고 그 좁은 문을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 ‘노오력’이라는 미명 하에 희생되고 있어 보입니다. 이것을 세대 간 갈등이라고도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이 ‘세대 간 갈등’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윗세대들이 미리 차지한 자본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식(ex. 정유라)에게 흘러들어가게 되어있습니다. 그 말인즉슨, 세대 간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대의 누군가와의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세대 간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계급 사회의 공고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른들은 그러시더라고요. "옛날에는 소시지, 계란도 너무나 귀했었다. 너네들은 배부른 시대에 살고 있다." 맞습니다. 그 부분 부정하지 않습니다.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고, 절대적 자원은 분명 증가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살면서 절대적 자원만이 중요할까요?’라는 문제입니다. 아니, ‘절대적 자원’뿐만 아니라 ‘상대적 자원’도 중요한 요소라는 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해당이 되는 명제입니다. ‘카푸친 원숭이’를 대상으로 했던 실험에 대해 설명을 한 번 드리겠습니다.

우리 두 개에 각각 카푸친 원숭이 한 마리씩이 들어있습니다. 원숭이가 가지고 있는 돌멩이를 과학자에게 건네면 과학자가 오이로 교환을 해줍니다. 그러면 두 마리의 원숭이는 오이를 맛있게 먹습니다. 그러면 또 가지고 있는 돌멩이를 과학자에게 건네면서 오이를 달라는 신호를 보냅니다. 그런데 과학자가 한쪽 우리 원숭이(A)에게 오이 대신 포도를 줍니다. 그리고 다른 쪽 우리 원숭이(B)에게는 원래대로 오이를 줍니다. 그러면 B 원숭이는 화를 내면서 오이를 집어던집니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돌멩이를 과학자에게 건네면서 다시 도전을 해봅니다. 그런데 다시 오이가 돌아오자, B 원숭이는 오이를 과학자에게 던지고 철장을 흔들면서 소리를 치며 크게 화를 냅니다.

B 원숭이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봅시다. B 원숭이는 절대적 자원에 있어 변화가 전혀 없습니다. 원래도 돌멩이 하나와 오이 하나가 교환이 되었고, 거기에 만족하면서 맛있게 먹었었습니다. 그런데 A 원숭이가 포도를 먹자 상대적인 박탈감이 들었던 것입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절대적 자원’ 뿐만 아니라 ‘상대적 자원’도 무시할 수 없는 가치인 것입니다. 인간도 동일합니다. ‘절대적 자원이 증가했으니 그냥 만족하고 살아라.’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존중하지 못한 공허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과거와 비교해 ‘절대적 자원’의 측면은 분명 나아진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인간 본성에 중요한 ‘상대적 자원’의 측면은 어떨까요? 청년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이 부분입니다. 노력에 따라 결과의 차등을 주는 것은 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 상황은 어떤가요? 아주 커다란 파이는 소수의 사람들이 노력 없이 그냥 가지고 있습니다. 남은 작은 파이만 노력으로 차등을 주고 있습니다. 결국 아무리 노력해도 작은 결과물(6두품) 밖에 가질 수 없고, 노력을 해도 그조차도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이런 사회가 발전에 도움이 될까요? 노력과 결과물의 상관관계가 ‘사회주의’에서만큼이나 관련성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현 사회가 사회주의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건강한 사회란 두 가지 조건이 만족되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노력과 결과물의 상관관계가 높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노력을 해서 사회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상관관계가 떨어지게 되면 좌절하게 되고 패배의식이 팽배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사회적 위치가 고정되지 않고 유동성이 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계급 사회와 사회주의가 실패한 것은 상기 두 요인을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사회는 계급이 고착화되고 경직된 사회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조선시대와 뭐가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먼 미래에 지금 현재의 우리네 사는 모습을 본다면, 그들은 우리를 뭐라고 생각할까요? 조선시대와 한 데 묶어서 ‘계급 사회’라고 정의한다면, 우리가 이를 부정할 수 있을까요? 우리 사회는 바뀌어야 합니다. 노력과 결과물의 상관관계가 커져야 합니다. 사회적 위치가 고정되지 않고 언제라도 뒤섞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행복 문제에 있어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유’라는 제목의 연재에서 누차 강조했던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구별하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제가 취업준비생과 상담한 과정에서도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을 해야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고 조언을 했는데요. 그럼에도 한 편으로는 ‘취업준비생 혼자가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많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회의 유동성이 적고, 노력과 결과물의 상관관계가 적으면,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없어져 버립니다. 아무리 찾고 노력해도 다 ‘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면 개개인이 행복을 찾을 여지가 없어져 버립니다. 지금 현재 사회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옛날보다 살기 좋아졌잖아.’라는 말은 지금 청년들에게는 별로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카푸친 원숭이에게 ‘원래 돌멩이 하나와 오이 하나를 교환했었잖아.’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다고 ‘기득권들이 모든 것을 내려놔.’라고 주장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제가 그 위치에 가면 저라도 안 내려놓고 싶을 거 같습니다. 그게 사람이니까요. 그러므로 기득권 개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라도 그 자리에 가면 비슷할 테니까요. 중요한 것은 어떤 사회적 합의로 어떤 사회적 시스템을 만들지에 대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치인도 아니고, 정치를 할 생각도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정신과 의사로서 개인적으로 바람이 하나 있다면, 개개인이 ‘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사회가 바뀌는 것에는 다양한 방법이 존재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중에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열망이 모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허공에 ‘바람’ 하나 던져봅니다. 적어도 ‘내 노력’과 ‘결과물’이 함께 움직이는 사회가 되기를요. 적어도 정유라 같은 사람에게 ‘부모를 원망해.’라는 소리는 듣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기를요.

이번 글에서 ‘노력과 결과물의 상관관계가 높아야 건강한 사회다.’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엄청나게 노력을 쏟아붓고 있는 ‘시험’이라는 것은 정말 노력을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주제와 관련해서도 ‘운인가 능력인가’라는 프로그램에서 다루고 있더라고요. 번외 편으로 다음 글에서는 ‘시험’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제가 ‘시험’이라는 건 정말 징~하게 봤었거든요. 할 말이 많을 거 같습니다.

원문 : 정신의학신문 - 이일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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